김훈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를 읽고 있다. 글 한 꼭지를 읽으면 책을 덮을 수밖에 없다. 우선 아까워서이다. 맛있는 케익 한 조각을 아껴 먹을 때처럼. 또 시간이 필요해서이다. 건조한 산문이 전하는 이 깊은 울림을 소화하는데.
화재 현장에서 16명의 생명을 구하고는 한 사람을 더 구하려다 숨진 서형진 소방사가 화재가 진압된 후 동료들의 들것에 실려 지휘관 앞으로 운구되는 장면에서 김훈은 그 시신을 바라보는 지휘관의 심정을 묘사하는 낱말을 단 하나도 쓰지 않는다. 김훈은 그저 지휘관이 현장에서 남긴 마지막 명령을 전할 뿐이다.
"장비를 벗겨주어라"*
망자는 그렇게 한평생의 멍에를 벗었다고,
김훈은 적었다.
12/12/09
* 김훈, "한 소방관의 죽음"의 일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서 봄.
("한 소방관의 죽음" 전문 보기)
지난 5월 25일 새벽 2시께 전남 여수시 교동 400번지 중앙시장 화재현장에서 2층 점포 내부의 인명을 수색하던 여수소방서 연등파출소 소속 인명구조대원 서형진 소방사가 화염과 유독가스 속에서 퇴로를 찾지 못한 채 쓰러져 숨졌다.
숨진 서형진 소방사는 선착대로 현장에 도착해서 곧바로 3층으로 투입되었다. 서 소방사는 3층 유리창의 방범용 쇠창살을 도끼로 찍어내고 창틀에 매달려 아우성치던 16명을 굴절사다리 바스켓에 묶어서 지상으로 대피시켰다. 서 소방사는 이어 3층 내부(2,139㎥, 점포 30여 개 및 볼링장, 당구장, 극장, 기계실)의 인명수색을 마치고 다시 2층 내부로 진입했다. 이때 3층은 연쇄인화 직전의 매연으로 가득 차 있었고, 2층은 극성기의 화염이 살수공격으로 수그러들면서 열기와 유독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보증금 1천 8백만 원짜리 전세아파트에 26세의 젊은 아내 박미애 씨와 지난 2월에 태어난 젖먹이 아들, 그리고 노부모를 남겼다.
지난 5월 20일, 그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월급을 받았다. 그가 숨진 5월 25일, 그의 아내는 남편이 벌어온 월급 중에서 6만 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소복을 한 젊은 아내는 돈에 관하여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늘 잠이 모자라서 꾸벅거리던 남편의 고달픔과 그리고 현장 2층의 암흑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까지 남편이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뜨거움을 되뇌면서 쓰러져 울었다. 그 여자는 “아, 그 뜨거운 곳에서……”라며 울었다. 아무도 그 여자의 울음에 개입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여자를 달랠 수 없었다.
이날 화재는 24일 밤 11시 21분에 여수소방서 상황실에 전화로 신고 되었다. ‘중앙시장이라는 신고에, 상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본서 상황실 당직관 유호일 소방경은 현장과 최근거리(1.5킬로미터)에 있는 연등파출소에 초동출동을 명령했다. 이날 밤 여수시 동북부 지역(구 여수권) 당직 상황실장은 이규준 소방위였다.
이규준 소방위는 연등파출소의 차량 6대(지휘차, 구조대, 펌프차, 앰뷸런tm, 사다리차, 화학차)와 대원 20여 명을 인솔하고 11시 24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이 병력이 이날 진압 전투의 선착대였다. 선착대가 도착했을 때, 2층 유리창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화염과 연기가 3층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2층 유리창들은 모두 다 방범용 쇠창살에 가로막혀 있었다. 3층 유리창도 대부분이 마찬가지였고, 몇 군대 유리창에는 쇠창살이 없었다.
쇠창살에 갇힌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쇠창살이 없는 창문에서는 매연에 쫓긴 사람들이 곧 뛰어내릴 기세였다. “뛰어내리지 마라. 바람 쪽으로 머리를 낮추고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이규준 소방위는 핸드마이크로 3층을 행해 소리쳤다. 그러나 뛰어내릴지 말지는 소방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 화염속에 갇힌 사람들이 판단할 일이었다. 선착대는 쇠창살 없는 유리창 밑 인도 위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4명이 뛰어내렸다. 부상자는 없었다.
이규준 소방위는 구조대원에게 3층 옥내 진입을 명령했다. 홍갑석 소방교, 김종수 소방사 그리고 숨진 서형진 소방사가 굴절사다리를 타고 3층 창문으로 접근했다. 바스켓을 창틀에 밀착시키고 도끼로 방범 쇠창살을 부수었다. 굴절사다리는 세 번을 오르내리면서 16명을 지상에 내려놓았다. 부상자는 없었다. 구조대원들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3층 유리창을 통해 3층 옥내로 들어가서 30여 개 점포와 볼링장과 극장을 수색했다. 인명이 없음을 확인한 구조대원들은 3층 옥외계단으로 철수했다.
그때 거리에 모여서 발을 구르던 주민들이 “2층에서 바느질하는 할머니가 못 나온 것 같다”고 고함쳤다. 서형진 소방사는 옥외계단을 따라서 2층으로 내려와 2층의 방화용 철문을 도끼로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형진 소방사는 거기서부터 27미터를 전진한 자리에서 죽었고, 2층에 그가 구하려던 할머니는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부재가 확인되지 않는 한, 그는 2층 불길 속에서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옥외에서 쏘아대는 물줄기가 화점에 닿지 못하자 정오채 서장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통로 돌파를 명령했다. 중앙통로는 방범 쇠창살과 철제 셔터로 막혀져 있었다. 전동장치로 개폐되는 문이었는데, 이미 옥내 전원은 끊어져 있었다. 철제 셔터는 열기를 받아서 뜨거웠다. 대원들은 물을 뿌려 철문을 식혀가며 도끼와 유압절단기로 철제 셔터 아래쪽에 구멍을 뚫어냈다. 이 작업에 약 12분이 걸렸다.
이 구멍을 통해서 수관 4개가 2층 옥내로 들어왔다. 수관 1개마다 4명씩의 관창수가 붙어 있었다. 관창수들은 2층 화점을 공격하면서 1층과 3층으로의 연쇄 인화를 차단했다. 새벽 1시 30분께 화재는 진압되었고 서형진 소방사는 동료들의 들것에 실려 지휘관 앞으로 운구됐다. “장비를 벗겨주어라.”라고 정 서장은 말했다. 대원들이 서형진 소방사의 무장을 해재했다. 공기호흡기, 도끼, 망치, 손전등, 안전모, 개인 로프를 떼어주고 방열복을 벗겨주었다. 그는 그렇게 한평생의 멍에를 벗었다.
28일 영결실에 그는 소방교로 추서되어 국립묘지로 갔다. 그가 세상에 남긴 젖먹이 아들의 이름은 서정환이다. 그의 장례식 다음날이 정환이의 백일이었다. 화재피해를 입지 않은 1층과 3층은 다음날부터 정상영업을 계속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는 온통 장관부인들의 고급 옷에 관한 것뿐이었다.
* 서형진 씨는 1999년 5월 25일 중앙시장 화재 현장에서 16명의 생명을 구하고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