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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전집 독서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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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러브크래프트, 러브크래프트 전집, 정진영 옮김. 황금가지.

(데이곤, 니알라토텝, 그 집에 있는 그림, 에리히 잔의 선율,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



러브크래프트는 대체로 첫문단과 마지막 문단이 좋다. 대게 독백 형식으로 시작되는 첫문단은 늘 이미 맛이 간 화자가 등장해 자신이 왜 이런 처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식이다. 같은 패턴이지만 늘 흥미롭다. 데이곤의 첫문장은 이렇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나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정신적으로 퍽 긴장한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인용끝.


그리고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곧 끝을 낼 시간이다. 미끈거리는 거대한 몸뚱이가 육중하게 바닥을 밟고 오는 굉음이 들려온다.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럴 수가, 저 손! 저 창문! 창문!" 인용끝.


러브크래프트 소설에는 유독 달빛이 많이 등장한다. 늘 변주되는 달빛 묘사를 읽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화자는 보통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인물이었다가, 그 합리성이 붕괴되는 격렬한 경험을 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도 때론 비합리적인 삶의 변덕에 무너지곤 한다. 다음은 니알라토텝에 나오는 문장이다.


"우리가 달빛에 의지한 채 상상할 수 없는 운명을 예감한듯 무의식적으로 행렬을 이루어 가는 동안, 나는 녹색의 달에서 떨어지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 어두운 황야를 지나갈 때, 오싹한 달빛에 반짝이는 것은 눈이었다. 자취 없는 불가사의한 눈발이 한쪽에만 흩날렸고, 반짝이는 눈의 장막 사이에 더없이 어두운 심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용끝.


그다음 단편 그 집에 있는 그림은 환상적이다. 진정한 향락주의자들은 공포의 전율을 생의 목표로 삼는다는 첫문단부터 심상치 않다. 노인과 함께 실로 역겹고 고어한 그림을 구경하다가, 기이할 정도로 노인이 그 그림에 광기를 보이기 시작하는 과정, 그리고 노인의 비밀이 점차 드러나는 과정은 압권이다. 마지막에 천장에서 한방울의 무엇인가가 떨어지면서 긴장은 폭발하고, 바로 그 폭발과 함께 단편도 끝난다.


에리히 잔의 선율은 러브크래프트가 우주에서 온 색채 다음으로 자기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 작품이라 한다. 에리히 잔은 경악과 공포의 순간, 주인공에게 전하는 말을 잔뜩 적는다. 그러나 그 비밀이 담긴 종이는 광풍이 닥치며 모두 창밖으로 날아간다. 탄식이 나오는 순간이다. 에리히 잔은 어떤 비밀을 털어놓았던 것일까. 에리히 잔의 연주는 대체 무엇을 막아내기 위한 연주였던 것일까. 광기의 선율 속에서 주인공이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은 이 작품 최고의 순간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던 것일까.

 

허버트웨스트-리애니메이터는 6개의 작품이 변주되며 같은 골격에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엔 서로 독립된 이야기같다가도 마지막엔 일종의 반전이 일어나는데, 기괴하고 섬뜩하지만 한편으로 통쾌하기도 하다. 하나 언급할만한 건 러브크래프트의 모든 화자는 결국 호기심이 공포심을 이긴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던데, 고양이만 죽이는 건 아닌가보다. 허버트 웨스트는 훗날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혹은 미친 의학자의 원형이 아닐까한다. 러브크래프트 이전에도 이런 광기의 의사가 등장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처음에는 약간 괴짜에 과도한 의욕이 있는 정도이지만, 자신의 연구에 집착할수록 겉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고 파멸에 이르게 된다. 모든 집착의 끝을 묘사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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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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