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소멸 (3)
모험러의 책방
「여기서 우리는 변화를 살피는데 보다 확고한 근거를 갖추게 되는 바, 이원적이고 폐쇄적인 체계에서, 하나의 진전에는 반드시 다른 하나의 후퇴가 있기 마련('변變'은 양이 물러나는 것이고 '화化'는 그와 동시적으로 행해지는 음의 진전)이다. 변화가 있다함은 바뀜이 있음을 뜻한다. 생산이 없는 순환이란 없으니, 교대란 갱생의 조건 그 자체이다. 쉼이 없는 운동은 소진될 것이며, 운동이 되지 못하는 쉼 또한 소멸되고 말 것이다. 동과 정은 '서로를 내포하니', 낮은 운동이며 밤은 쉼이다. 이 교대로 말미암아 세계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고 한결같이 지속된다. 하늘에는 가시와 비가시, 땅에는 성쇠의 교대가 있다. 그러므로 대립이란 '존재'와 '무'의 대립이 아니라 현동現動과 잠재潛在(명明과 유幽)의 대립일 뿐이..
'소멸'도 좋지만 김상일 선생이 쓰는 '이울어짐'(perishing)이라는 번역어가 화이트헤드의 의도를 더 잘 살리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 더 정확히는 플라톤 ― 의 생성의 학설은 소멸의 학설(doctrine of perishing)에 의해 균형잡혀져야 한다. 계기는 소멸할 때에 존재의 직접성으로부터 직접성의 비존재로 이행한다. 그러나 이는 무(無)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모든 시간은 소멸하여, 해명을 위한 방도가 되어간다.'(Pereunt et imputantur.) 인류의 일상적 표현은 우리 과거에 3개의 양상 ― '인과성', '기억', 그리고 직접적 과거의 경험을 그것의 변형된 현재의 기초로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 을 부여한다..
「신학의 임무는 어떻게 '세계'가 단순히 변천하는 사실을 초월한 그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에 있으며, 또 어떻게 '세계'가 소멸하여가는 계기들을 초월한 그 무엇에 귀속되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시간적인 '세계'는 유한한 성취의 무대이다. 우리가 신학에 요구하는 것은, 소멸하여가는 삶 속에서도 우리의 유한한 본성에 고유한 완성을 표현하는 가운데 불멸하는 그런 요소를 표현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서 삶이 기쁨이나 슬픔보다도 더 깊은 만족의 양상을 포함하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14/11/17 *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