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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만의 진리는 없다 본문
「동양철학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자만을 하지 마라. 이 원칙은 바로 앞의 것과 모순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과 사태에는 동이同異가 더불어 있고, 길은 대개 절충과 중용에 있는 법이다(절충 또한 용어의 의미가 전통 이전과 이후에 현격히 달라졌다).
스토아 학파의 황제의 어록을 펼치면 "이런, 유교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네"하고, 또다른 노예 철학자의 어록을 펼치면 "이런, 서양에도 불교가 가르치는 대로 살았던 사람이 있었네"하고 놀라게 된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을 자연의 신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기氣를 윤리학의 근원으로 보는 화담과 장재는 물론, 원형이정元亨利貞과 인의예지를 이理, 즉 자연의 '의지'이자,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한 '주자학'의 사유에 바짝 다가간 듯한 흥분을 느꼈다. 그동안 우리는 윤리학이 '당위'이고, '강제'이고, '외적 규율'이어야 한다는 '편견'(?)에 너무 깊이 침윤된 나머지 ― 그리고 그것은 또한 범람하고 있는 무질서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한데 ― 윤리의 목표가 성숙이며, 그것은 우리가 밖을 향해 악을 쓰느라 잊어버린 '자연'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통해, 그와의 '합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소치였다.
하여간,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양철학'만'의 진리는 없다!는 것. 동양철학에서 실험되고 다양하게 표명된 교설은 다른 어디선가, 물론 좀 다른 개념과 어법, 맥락과 상황을 깔고 있지만, 실험되고 표명된 것이다. 물론 꼭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표면을 뚫고 들어가 근본적 취지와 닿을 때, 그것은 자주 놀랍도록 비슷하고, 때로는 똑같아서 사람을 놀래키는 수가 많다. 이를테면, 에드워드 콘즈는 불교가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무슨 특별한 비의적 가르침을 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한 바 있다. 불교의 핵심적 교의는 흄이나 쇼펜하우어, 윌리엄 제임스가 훨씬 정교하게 익숙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고도 했다. 불교의 독특함과 강점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체현體現, 즉 '몸으로 구현하는' 열정의 강렬함과 그 수단의 정교함과 풍부함에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 말에 전폭 동의한다. 그러니, 둘은 공유점이 많고, 서로 배울 곳이 많다.」*
- 한형조
동의한다. 다만 한가지, 불교 혹은 동양철학의 전통에서 체현體現, 즉 몸으로 구현하느냐 못하느냐는 천국이냐 지옥이냐, 행복이냐 절망이냐, 충만함이냐 허무함이냐, 아라한이냐 중생이냐, 대장부냐 향원이냐, 실재냐 환영이냐, 진짜냐 가짜냐를 가르는, 거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붓다는 그 체현의 기술로 '깨어있음'(위파사나)을 가르쳤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적 교의로 그 나머지 찌꺼기는 몰라도 그만이다. 혹은 아예 교의 자체도 잊어버리는 것을 추구한다. 어떻게 책의 그 구구절절한 말들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고 증험해볼 수 있느냐, 즉 수행의 문제가 빠져있다면, 흄이나 쇼펜하우어, 윌리엄 제임스가 뭘 얼마나 더 정교하게 형이상학의 아이디어를 전개했든, 그것이 불교의 핵심 교의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
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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