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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유교)의 죄 본문
「현상윤은 해방된 이후 『조선유학사』를 쓰면서 그 마지막에 '유학의 죄'를 몇 가지 적어두었다.
1) 문벌을 중시하여 인재를 경시하고 계급을 고착시킨 점.
2) 가족공동체의 결속과 화해를 강조한 나머지, 배타적 가족주의로 흐른 점.
3) 당쟁의 격화로 하여 학문적 대화와 토론이 막히고, 국정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건설적인 제안이 채택되기 어려웠다는 점.
4) 무武, 즉 국방과 군사를 경시하고 문약에 흐른 점.
5) 가난을 자랑하고 상공업을 천시한 점.
이리하여 한말에 이르러 풍속은 무너지고, 국정은 문란하여,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무도가 일상화되었다. "나라가 있으되 주인이 없고, 주인은 있으되 국민이 없었다. 국민은 또한 원수와 도적뿐인데다 무지하고 유약하고, 나태하고, 신뢰가 없어 국맥을 유지하고 외모外侮를 막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책을 끝맺었다.
"우리는 그 책임을 유교의 말폐에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오호라, 유학의 말폐는 과연 유학 자체의 잘못이냐, 또는 조선 사람의 잘못이냐."」*
한형조 선생은 유학의 죄보다는 조선 주류 유학의 죄라는 쪽에 무게를 싣는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유학도 얼마든지 내적으로 혁신할 수 있고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체계로 거듭날 수 있다. 왕양명의 심학, 최한기의 기학, 최제우의 동학을 생각해보라. 반면 어떤 위대한 사상도 그것이 종교가 되고 지배 혹은 주류 이데올로기가 되면 껍데기만 남아 썩고 타락한다. 예수의 정신, 붓다의 정신, 노자의 정신, 공자의 정신, 마르크스의 정신, 예외가 없다. 심지어 21세기에 가장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인 생태주의도 그것이 일군의 집단이 권력을 잡아 사회에 강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다면 생태파시즘으로 변질할지 모른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빛나는 가르침과 사상을 탄압하고 이교도를 증오하는 기독교의 말폐가 같을 수 없듯이, 원시 유가의 핵심 정신과 그것의 말단은 같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문화권에서나, 성직자들이나 선비들 사이에서도, 이념화한 성인의 죽은 말이 아닌 살아있는 자기 내면의 도(道)를 궁구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은 드물었다.
1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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