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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공원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성매매를 '연애'라고 불렀다. 성매매나 매춘 같은 용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할머니들의 일은 '장사'와 '연애'의 경계에 서 있다. 남산 김 할머니는 "여관에 가서 씻겨달라는 사람, 손잡고 그냥 같이 누워 있자는 사람, 그냥 안고 자자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한푼 보탬이 안 돼도 할아버지들의 넋두리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엊그제 막내 동생을 땅에 묻은 최아무개(78) 할아버지는 속상한 마음에 친구랑 대낮부터 술을 한잔 걸치고 혼자 종묘공원을 찾았다고 했다.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공원에 나와 할머니들이랑 수다나 떨다 가는 거지.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속상한 마음 하소연할 데도 없잖아." 할아버지 옆에 앉은 유아무개(69) 할머니는 "많이 속상한가봐" 따위의 말을 하며 할아버지를 위로했다.

함경북도 함흥이 고향인 황아무개(81)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에 노인네가 갈 데는 여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인 먼저 보낸 게 27년 전이야.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겠어." 그는 할머니들과 종종 '연애'를 한다고 했다. "여기라도 나와야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나누지. 어디 딴 데 갈 데 있으면 좀 알려줘봐."

할머니들은 종묘공원 입구 화단으로 출근한다. 아침 일찍 나왔지만 하루 종일 공친 탓에 저녁이 되도록 쫄쫄 굶은 마산댁 할머니는 2500원짜리 짜장면을 양념까지 싹싹 긁어 먹으며 말했다. "젊었을 때 돈 많이 벌어. 늙으면 써주는 데도 없어."

모자 할머니는 3개월 전부터 종묘공원에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일하던 식당에서 김장을 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친 뒤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들이 가끔 이런 일 하지 말고 자기 집에 와서 집안일이나 도우라는데 몸이 성치 않아서 이제 그런 일도 못해."

남산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는데다 몇 해 전 늑막염 수술을 한 뒤 거동이 불편해 다른 일은 할 수 없다. 약수동 할머니는 "폐지 같은 건 하루 종일 주워봐야 몇천원 못 버는데 그걸로는 생활할 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들에게 성매매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이다.

젊은 시절 남편과 헤어지고 반평생을 혼자 산 마산댁 할머니는 경남 마산에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자격을 얻지 못했다. 마산댁 할머니의 아들은 막노동을 하다 사고를 당해 몇년째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들도 먹고 살기 힘든데 손 벌릴 수 없지." 마산댁은 기초노령연금 9만원과 성매매로 번 돈으로 집세 10만원과 생활비를 충당한다.

남산 할머니는 직장이 없는 늦둥이 백수 아들 하나와 함께 산다. 약수동 할머니의 아들은 용돈을 보내주지만 그걸로는 매달 집세조차 내기 어렵다.

"단속해서 조사해보면 할머니들이 대개 아프세요. 몸이 아프니까 일도 못하고,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치료비는 없고…. 사정이 다 딱해요. 다 먹고살려고 나와 있는 거죠." 혜화경찰서에서 종묘공원 성매매 단속을 맡고 있는 한 경찰은 "단속을 안 할 수는 없다"며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사람처럼 답답해했다.」*

12/11/09

* 한겨레, 12-11-09, <[토요판/르포] 종묘공원의 노인 성매매>에서 발췌.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21109154010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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