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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

모험러

비토리오 회슬레, 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 이신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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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철학과 데카르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고전적인 근대철학의 관계는 헬레니즘 철학과 고대 그리스 철학의 관계와 유사. 즉, 우리 시대는 방향 상실과 근본적 위기를 겪고 있는게 아닐까? 가령 헬레니즘에서 기독교의 원리와 같은 새로운 실체적인 원리를 준비하는 지적인 피상화와 박약화의 시기가 아닐까? 그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경향들이 선행하는 시기에 비해 정신적인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중에 출현했다는 것과 진리에 훨씬 더 근접했다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자동적인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관료적 과학주의와 비합리주의는 대립하고 있는 게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논리경험주의와 실존주의도. 두 견해는 똑같이 합리적 해결이란 오로지 개별 과학기술적 문제들에서만 가능하고 의미 물음들과 가치 물음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까닭에, 그것들은 비합리적 결단에 맡겨져야 한다는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20세기 철학을 지배하는 불길한 근본적 이원론, 즉 과학주의를 한편으로 하고 비합리주의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이원론.


기술적 이성 - "어떻게 나는 특정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목표 관철에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태도. 

가치합리적 이성 - "정당한 목표는 무엇인가? 어떤 수단이 허용될 수 있는가?"

후자가 포기되어오고, 전자가 추구되어왔다.


세계에 비합리적인 힘들이 두려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인간에게는 온갖 비합리적인 힘들 이외에도 합리성에 대한 해소될 수 없는 욕구가 존재한다. 비합리적 힘들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성에 대한 욕구를 지속적으로 좌절시키는 20세기 철학의 비합리적 경향을 동기지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결과일 것이다. 


객관적 관념론에서는 비합리적인 것 역시 전적으로 이성을 결여할 수 없다. 단적으로 비이성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서로 충돌하고 서로 방해하는 이성 형식들의 위계질서만이 있을 수 있다.


예술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면 상호주관적 인정에 대한 이러한 요구, 즉 우리가 오직 아름다움의 범주와만 결부시키지 가령 쾌(快)의 범주와는 결부시키지 않는 요구가 자기의 타당성을 어디서 이끌어내는 것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은 합리적 근거짓기에 대한 포기는 단지 예술을 환원주의적 설명 시도에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경우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생물학적으로, 예술은 사회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미학적인 것의 규범적 차원을 포기한다든지 아름다움을 그저 맘에 드는 것으로 환원하는 경우,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예술 작품을 수집하거나 장려하는 데 공적인 수단을 지불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진리와 역사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숟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다만 진리〮논리가 역사적이라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역사가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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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이신철)의 글


사실 객관적 관념론의 견해는 특히 20세기 이후의 회의주의적이고 해체론적인 정신적 풍토에서 세계란 이성적 전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시대적 확신에 비추어보자면 거의 ′정신착란으로까지 치달은 어리석음′으로 치부될 정도이다. 또한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극복된 철학으로 보인다. 19, 20세기의 경험 과학들의 승리와 더불어 관념론적 철학 체계들은 단적으로 ′붕괴′되었으며, 관념론적 체계들 대신에 유물론, 실존철학, 논리실증주의, 신선험주의, 언어분석철학, 해체주의 등 수많은 기획이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논리와 실재는 공통적인 것을 거의 지니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논리적인 필연성이란 단지 사유에 대해서만 구속력을 지닐 뿐, 실재에 대한 강제력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논리적인 것은 한갓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주 단순한 반성을 통해 그것에 반대할 수 있다. 그것은 ′비합리적′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하나의 범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범주의 의미는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나아가 실재가 무언가 사유가 도달할 수 없는 것, 즉 ′사유에 낯선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사유 규정들 속에서 파악할 수 없는 실재를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사유에 낯선 실재라는 것은 이미 ′사유에 낯선′ 것이자 또한 ′실재′로서 범주화된다. 그러므로 단적으로 사유에 낯선 것, 범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범주를 통해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논리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 즉 정신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존재에도 논리적인 것이 그 근저에 놓여 있다는 생각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무엇보다 이 저적은 옮긴이로 하여금 객관적 관념론과 최종적으로 근거지어진 하나의 철학 체계 이념이 한갓 망상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학문의 내적 본성 및 이성의 내적 필연성을 지닌 요구라는 것을 이해하게 만든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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