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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세계들의 모임이다

모험러

「우리가 흔히 실제로 의미 있게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세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라는 형식논리적 개념보다는 특정한 범주로 묶어서 통일성을 줄 수 있는 영역적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질적 차별성을 지닌 영역으로서의 세계들의 모임은 '세계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런 세계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예컨대 후설은 그런 세계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본다. 즉 각각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그래서 실제 우리 주변의 '자연적인 세계'와 '가치의 세계' '정치의 세계'와 같은 관념적인 세계들, 즉 "동시에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 두 세계는, 그 세계들이 모두 나와 관련 있어서 내가 자유롭게 내 시선과 작용을 어느 한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옮길 수 있다는 점을 도외시한다면 서로 무관하다."


이러한 설명 모델은 학문들 간의 환원적 관계를 문제시할 때 의미있는 함축을 제공한다. 서로 다른 두 영역이 논리상 독립적이라면, 한 영역이 다른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대상 영역에 대해 성립하는 학문들 역시 환원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환원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환원주의가 참된 세계와 가상의 세계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향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도덕적 규범이나 윤리적 행동 양식이 진화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래서 도덕적 규범이 생물학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행동 양식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곧 생물학적으로 설명되는 현상이 진짜 현실이고, 도덕적이며 규범적인 현상들은 일종의 가상의 세계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가치의 영역이나 문화의 영역은 인간 삶에서 독자적인 현상 영역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현상 영역을 잘 설명할 원리와 방법론을 가진, 말하자면 그런 영역에 고유하고 적합한 학문 역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이렇게 각각의 영역이 독립적이라고 해도 그들 각자가 아예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다. 후설의 말에 좀더 귀를 기울여보자.


철저한 구별은 결코 서로 얽혀 있음과 부분적인 중첩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물질적 사물'과 '영혼'은 상이한 존재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영혼은 물질적 사물에 토대를 두고 있고, 이로부터 영혼론이 신체론에 토대를 두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직관에도 잘 어울리는 이러한 묘사는 각각의 세계가 어떻게 서로 의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영역이 다른 영역을 토대로 삼을 경우, 토대가 되는 영역은 그것에 의지해 있는 영역의 존립 기반이다. 물론 그것이 곧바로 두 영역 사이에 환원관계가 성립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령 집이라는 건축물이 그 건축물을 지지해주는 지반을 토대로 삼고 있다고 해서 집이 땅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16/05/25


* 박승억, <학문의 진화: 학문 개념의 변화와 새로운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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