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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야 할지, 누가 그 일을 해야 할지가 불분명해진 사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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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야 할지, 누가 그 일을 해야 할지가 불분명해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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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일 자기 확신 ― '현재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는 확신감 ― 이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자리할 유일한 기초라면, 우리 시대에 믿음이 불안정해지고 취약해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왜 그리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먼저, '세상을 앞으로 가게끔 하는' 이 뚜렷하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액체 근대를 맞이한 우리 시대의 가장 통렬하면서도 해답이 요원한 질문은 (세상을 더 나은,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이다. ... 기 드보르를 인용하자면, "통제센터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유명한 지도자나 분명한 이데올로기가 그 중심을 점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번째로, 실천주체가 ― 어떤 실천주체이든지 간에 ― 세상을 개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자꾸만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두 세기에 걸쳐 수많은 붓을 가지고 다양한 색으로 그려낸 행복한 사회의 이미지들은 모두 이룰 수 없는 백일몽이거나, (그 사회의 도래가 선포된 경우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사회를 설계하는 형식 하나하나가 행복보다는 차라리 엄청난 불행을 양산했음이 입증되었다. 이는 두 적수들, 지금은 파산한 마르크스주의와 현재 잘나가고 있는 경제 자유주의 양편에 똑같이 적용된다(잘 알려진 것처럼 자유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피터 드러커가 1989년 지적했듯이, "자유방임 역시 '사회를 통한 구제'를 약속했다. 즉,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여 결국 완벽한, 혹은 가능한 선에서 최상의 사회를 이루게 될 것"이라 하였는데, 그런 점 때문에 그러한 호언장담은 이제 더 이상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때 그 비슷한 주장들에 대해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던진 질문, "도대체 어떤 사상이 보편적 해방을 향한 과정에서 (······) 일반적 의미의 아우슈비츠를 피해갈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물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여호수아 담론의 전성기는 끝났다. 이미 화폭에 담겨진, 입맛에 딱 맞게 그려진 세상 그림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고,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은 선험적으로 의심스럽다. 우리를 이끌어줄 목적지라는 개념이 없이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데, 살기 좋은 사회를 찾으려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무엇이 우리를 정처 없이 질주하게 만드는지도 확실치 않다. "더 이상의 사회적 구제는 없다. (······) 이십 년 전 린든 존슨 대통령이 하던 식으로 오늘날 '위대한 사회'를 주창하는 자가 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비웃음감이 될 것이다"라고 한 피터 드러커의 평결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한치의 오차 없이 포착하고 있다.」*


15/08/26


*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근대. (이일수, Trans.). 도서출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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