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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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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하고 비정한 주어진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그 주어진 세계를 뒤집으려는 인간의 투쟁 역시 동시에 긍정하는 것은 가능할까? 아무런 희망과 절망 없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불평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떤 것에도 냉소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질서를 바꾸려 시도하고 저항하는 것은 가능할까? 나는 어느 정도의 양만큼 모순을 내 안에 품을 수 있는 걸까? 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어젯밤 집에 가는 길 내 머릿속을 괴롭혔다. 오늘 책을 읽다 보니 김훈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의 운명이 약육강식이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약자로서 살기 위해 나보다 센 놈한테 내 살점을 먹이로 내주어야만 한다면 또 그걸 뜯어먹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개돼지나 마찬가지입니다. 금수축생이나 버러지와 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끝없이 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짓밟혀가면서 또 끝없이 저항하는 것이죠. 이런 모습들을 소설로 감당해내기에는 저의 역량은 부족합니다. 다만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또 그것을 통해서, 그것과 더불어 인간의 아름다움을 증명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 김훈, '회상'*

"약육강식의 문제는 참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훌륭한 대학에 입학했다면, 그것은 약육강식의 질서에서 강자의 대열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류가 겪은 수많은 혁명은 아마 인간이 약육강식의 질서에 승복할 수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일 것입니다. 볼셰비키혁명, 갑오농민전쟁, 프랑스혁명이 다 그렇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다만 약육강식의 외양이 세련되어 가는 것이죠. 겉모습이 세련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 많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 김훈, '말과 사물'*

12/12/17

* 김훈, <바다의 기별>에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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